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

대정읍 2008. 12. 5. 22:18 Posted by jeju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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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역비(內譯碑)

  이 곳은 제주 4·3사건 비극이 진정된 국면으로 접어들 무렵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내무부 치안국에서 일제 식민지 치하 우리민족을 압살하던 예비검속법(1945년 10월 9일 미군정청에 의하여 폐지됨)을 악용 당일 오후 2시 요시찰인 및 형무소 경비강화, 6월 29일 불순분자 구속, 6월 30일 구금자 처형 등의 내용을 전문으로 각 경찰국에 지시함에 따라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서 344명을 예비검속하여 관리해오다 7월 16일 63명이 군에 인계된 후 20명은 섯알오름에서 1차 학살되었으며 2차로 8월 20일 새벽 2시에 한림수용자 60명을 새벽 5시에 모슬포수용자 130여명 등 210여명을 법적 절차없이 집단 학살하여 암매장한 비극의 현장이다.

비극의 전말(顚末)

1. 예비검속자 집단수용
  모슬포 경차서(당시 삼구?) 관내 각 지서에서는 6월과 7월 무고한 농민, 공무원, 마을유지, 부녀자, 학생 344명을 구인하여 모슬포와 한림에 분산수용, 경찰의 감호를 받으며 가족과의 면회를 실시하는 허용적 분위기를 조성시키면서 자의적 판단에 따라 A·B·C·D로 분류, 지병자의 병보석을 시행하는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것으로 사료됨.

2. 수용자의 집단학살과 암매장
  한국전쟁 당시 정부가 대전을 거쳐 대구, 부산으로 퇴각하는 와중에 모슬포 주둔 정부군은 210여명을 집단 학살 암매장한 후 반인륜적 만행을 은폐하고 시신 수습을 차단키 위하여 이 일대의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고 군, 경에 의한 경비를 강화하였음.

3. 시신 및 유골발굴과 안장
제1차 : 학살 사실을 처음 인지한 당시 대정읍 상모리 거주 이경익(李경益)씨와 정공삼(鄭公三)씨 등에 의하여 비보를 접한 유족 300여명이 학살 현장에 모여 27구의 시신을 옮기는 도중 경찰들이 공포를 쏘며 엄습해오자 유족들이 원상회복시키고 철수함.

제2차 : 유족들은 이웃의 질시와 능멸 그리고 연좌제로 입신양명의 길이 차단된 채 망연자실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차 한림유족들은 1956년 3월 30일 심야를 이용 시신을 수습하여 만병디 공동묘역으로 유해를 운구 60위로 맞춰놓고 치아와 유품을 통하여 가족으로 확인된 17구는 개인묘역으로 옮기고 43위는 현 묘역에 안장하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백조일손 유족들이 4월 28일 학살된 현장에서 유해를 발굴 도중 무장군인의 저지로 해산함.

제3차 : 군·관의 타협에 의하여 유해발굴이 공식 허용되자 백조일손 유족들은 1956년 5월 18일 유해가 암매장된 굴 속의 물을 양수기로 흡출하여 유해를 발굴하게 되었다. 자타 구분 없이 뒤엉킨 유골을 준비된 칠성판 위에 머리뼈, 팔뼈, 다리뼈를 적당히 맞춰 149개로 구성하였는데 후환이 두려운 일부 유족들에 의하여 17구는 개인묘지로 옮겨지고 132구는 미리 마련한 현 묘역에 안장하여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 명명하였다.

2007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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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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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터
시신 수습되어 만벵디 묘역에 묻힘
만벵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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